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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뉴라시아 길 위에서] 서독총리 무릎 꿇었던 '게토 기념 비'… 역사의 順理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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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선영
댓글 0건 조회 2,517회 작성일 14-08-26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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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뉴라시아 길 위에서] 서독총리 무릎 꿇었던 '게토 기념

비'… 역사의 順理 보았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입력 : 2014.08.25 03:02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나며]

1970년 차가운 겨울비 오던날
獨총리, 눈물로 나치 만행 사죄… 폴란드는 그 모습 기리며 보답

진심과 진심이 통한 역사 보며 獨과는 다른 어느 나라 떠올라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바르샤바 와지엥키공원은 우거진 숲 76㏊가 왕궁을 품고 있다. 아침 숲길을 오가는 건 공작과 다람쥐, 산책 나온 사람 몇뿐이다. 딱 한 곳 쇼팽 동상 주변만 갖가지 언어로 떠들썩하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에서 온 단체 관광객이다.

쇼팽 동상은 나무 아래 눈 내리뜨고 앉아 악상(樂想)을 떠올리는 모습이다. 나무는 가지가 모진 바람에 쓸려 눕다시피 했다. 건반 두드리는 쇼팽의 길고 가는 손가락을 닮았다. 바르샤바 서쪽 쇼팽 고향에 많은 버드나무다. 폴란드 사람들은 버드나무를 '우는 나무'라고 부른다. 몰아치는 망국(亡國)의 비바람에 흐느끼듯 날린다고 해서다.

폴란드는 18세기 말부터 123년 동안 나라 이름을 잃고 '비스와(Wisla) 강변 땅'으로 불렸다. 학교에선 러시아어나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그 시절 나라를 등진 행렬에 스무 살 쇼팽도 있었다. 파리에서 늘 고국을 생각하며 곡을 썼다. 그의 음악은 슬픈 시대를 버티는 폴란드인의 희망이고 위안이었다.

2차대전 때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도 쇼팽의 의미를 잘 알았다. 쇼팽 음악을 금지했고 몰래 듣는 사람을 잡아 가뒀다. 나치는 쇼팽 동상을 가져가 머리만 남기고 녹여버렸다. 전쟁 끝나고 머리를 되찾아와 다시 세운 것이 지금 동상이다.

쇼팽은 대통령궁 근처 성십자가교회에도 살아 숨 쉰다. 그가 다녔던 집 근처 교회다. 예배당 기둥에 '여기 쇼팽의 심장 잠들다'라고 쓰여 있다. 그의 심장은 유언대로 크리스털 상자째 기둥 속에 묻혔다. 동상처럼 나치에 빼앗겼다 돌아오는 굴곡도 겪었다. 쇼팽은 심장으로 말한다. 나라가 망해도 민족의 언어와 예술이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서고야 만다고.

도심 서북쪽에 유대교 예배당 '시나고그'가 있다. 2차대전 전까지 이곳에서 북으로 2.5㎢가 유대인이 모여 사는 '게토'였다. 그 무렵 폴란드 인구의 13%, 350만명이 유대인이었다. 바르샤바에만 33만명이 살았다. 너그러운 폴란드인들이 천 년 전부터 받아들였다. 이제 2000명만 남았고 300개였던 '시나고그'도 하나밖에 없다.

게토 중심 무라노우는 아파트 깔끔한 중산층 주택가가 됐다. 큰길가에 기념비가 서 있다. 1943년 나치의 소탕 작전에 맞서 싸우다 1만3000명이 죽고 5만6000명이 수용소로 끌려간 '게토 봉기'를 기린다. 이듬해엔 폴란드 시민이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다가 20만명이 학살당했다. 나치는 보복 삼아 구시가지와 왕궁·문화재를 폭파했다. 바르샤바에 입성한 아이젠하워가 말했다. "부서진 도시를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 파괴된 도시는 보지 못했다."

1970년 브란트 서독 총리가 게토 기념비 앞에 무릎 꿇었다. 겨울비를 맞으며 눈물로 독일의 과거를 사죄했다. 폴란드 국민의 마음을 흔들었다. 기념비 앞 유대인 박물관 뒤로 돌아가면 '빌리 브란트 소공원'이다. 무릎 꿇은 브란트의 부조상이 있다. 독일의 진심에 폴란드가 건넨 보답이다. 독일과 너무도 다른 나라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대장정’원정대원들이 지난 22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게토’희생자 추모탑을 방문해 현지 대학생 가이드로부터 빌리 브란트 전(前) 서독 총리의 일화를 듣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 총리가 같은 장소에서 유대인 희생자를 위해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모습.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대장정’원정대원들이 지난 22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게토’희생자 추모탑을 방문해 현지 대학생 가이드로부터 빌리 브란트 전(前) 서독 총리의 일화를 듣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 총리가 같은 장소에서 유대인 희생자를 위해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모습. /오종찬 기자·corbis
옛 시가지엔 바르샤바 봉기 70년, 자유선거 25년을 기념하는 작품들이 늘어섰다. 폴란드는 중동부 유럽 공산권에서 맨 먼저 민주 정부를 세웠다. 잿더미였던 도시를 '동유럽의 파리' '꽃의 도시'로 되살렸다. 한국인 닮은 교육열과 성취욕으로 '유럽의 공장'이 됐다. 작년 GDP 5139억달러는 체코·헝가리·슬로바키아 GDP 합계보다 많다. 폴란드는 17세기 중부 유럽을 제패했던 대국의 꿈을 향해 뛴다. 그 힘은 착실하게 일궈 가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나온다. '뉴라시아 원정단'은 바르샤바에서 역사의 순리를 생생하게 봤다.

1구간 대원들이 바르샤바까지 751㎞ 길을 함께 달려내고 귀국했다. 걸그룹 스타와 청각장애 수퍼모델이 철인(鐵人) 라이더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넉 달 전 전역한 공군참모총장이 서툰 손으로 야영 텐트를 쳤다. 대기업 사장과 스님이 야영장 쓰레기를 주웠다.

바르샤바를 떠나는 날 1구간 대원들의 빈자리가 컸다. 자전거 행렬이 유난히 짧고 허전했다. 원정대를 따뜻하게 맞아 정성껏 저녁을 대접해준 교민회와 공관 사람들과도 헤어졌다. 폴란드 횡단 여드레 내내 열심히 안내한 여대생 카롤리나는 원정대와 일일이 작별하고도 이튿날 아침 다시 왔다. 대원들을 전송하러 나왔다.

그렇게 인연 맺고 정(情)들이고 떠나면서 대원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마다 소중한 순간들을 갈무리했다. 원정대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1만5000㎞를 갈 것이다.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자 장대비가 퍼부었다. 보란 듯 대원들의 페달질이 더욱 힘찼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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